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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가 된 돌죽의 세계 | 돌죽문학) 현대 사회가 된 돌죽의 세계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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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글쓰는유동 작성일19-07-08 09:50 조회33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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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 : 자신의 친구 상만(28세, 남, 오카와루의 가고일)이 세 달간의 병원신세 끝에 완쾌되기까지를 정리해보며, 노광(28세, 남, 트로그의 미노타우로스)은 자신과 상만을 공격해온 운정(29세, 여, 베후멧의 텐구)에게 품었던 분노가 사실 자신의 편견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을 되새긴다. 복잡해진 머릿속을 달래고자, 노광은 모처럼의 주말을 이용하여 만신전(The Temple)으로 향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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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전부터 신들의 제단은 한데 모여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름없는 영웅이 야만의 시대를 종식시키고 문명의 시대를 열기 전부터, 만신전의 전통을 긴 세월에 걸쳐 전해져왔다. 도시 역시 마찬가지였고, 오히려 도시였기에 더더욱 만신전의 중요성이 컸다. 수많은 종족들이 수많은 신을 믿으며 함께 살아가는 도시의 중앙에는 두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하나는 시청이고, 하나는 만신전이다. 시청의 규모는 다른 공관서와 다를 바 없이 평범했지만, 만신전은 이 도시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 도시의 막대한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도시의 이념인 조화를 상징하기 위해서라도 만신전은 도시에서 가장 크고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어야 했다.

태곳적부터 만신전에서 추방당한 심연의 신 루고누의 제단이나, 대다수의 신도들이 범죄자에다 음지에 숨어 사는 탓에 발길이 끊긴 디스메노스의 제단. 선신들의 위세에 쫓겨난 이레데렘눌과 키쿠바쿠드하의 제단. 신도들이 자연재해를 몰고 다니는 탓에 모두 도시 밖으로 이주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진 콰즈랄의 제단. 그리고 신도들 스스로 자신들의 제단은 열등한 만신전에 있을게 아니라며 제단을 빼버린 베오그의 제단을 제외한 모든 신들의 제단이 이곳 만신전에 모여 있었다. 근 반세기 동안 슬라임 인권운동의 확산에 따른 신도들의 급증 덕에, 오늘날에는 지이바의 제단도 당당히 만신전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원룸촌으로부터 대충 걸어서 30분 정도. 상만이 말하기를 날아서 가면 훨씬 빨리 갈 수 있다는데, 노광은 태어나서 단 한번도 비행이란걸 해본적이 없다. 비행을 체험할 수단이야 많았으나(비행 반지라든가) 그보단 자신의 발로 직접 땅을 디디며 걸어가고 뛰어갈 때의 순간이 좋았다. 노광은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미노타우로스다운 기질이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이 좋아서, 노광은 학창시절부터 육상부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만약 그가 혈기넘치던 시절의 분노를 조금만 더 억누른 채 입시에 매진했더라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 터였다-그러나 그런 고민도 노광에겐 익숙치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고, 과정이야 길었지만 결국 업화 철거소에 취직하여 당당한 사회인으로 거듭나지 않았던가. 분노를 절제하지 못한 건 자신의 잘못이었고, 업화 철거소에 취직한 건 자신의 성취였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해도 괜찮은걸까? 노광은 빛나는 자의 신도인 만신전 경비원에게 신분증을 보여주고, 간단한 출입 절차를 거치는 내내 스스로의 태도에 대해 고민했다. 자신의 삶에 있어, 위대하신 트로그 님의 은총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해냈다고 생각하는 태도가 옳은걸까? 냉정하게 생각해보자면, 자신이 트로그 님의 신도라는 점은 부당한 대우와 편견에 찬 시선만을 가져다주었을 뿐이었다. 트로그 님을 신앙하지 않고, 예를 들어 무검회나 오카와루를 신앙하는 채로 업화 철거소에 면접을 보았더라면 그래도 붙지 않았을까?

만신전의 중앙 홀에는 오늘도 적잖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저마다의 신을 모시기 위해 홀 이곳저곳에 자리한 제단에 무릎을 꿇는 사람들. 분쟁의 시대를 끝내고 도시가 건설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천장화의 끝자락에는 바로 아래의 중앙 홀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상만은 천장화에 쓰인 물감이라든가, 작품의 구성이라든가에 열광했지만 노광은 그렇지 않았다. 노광은 그러지를 못했다. 이 천장화를 볼 때마다, 노광은 과연 자신이 어디에서 열정을 느끼는지 자문해보았다.

그런 의문을 풀기 위해서라도 노광은 트로그의 제단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입구를 등지고 섰을 때, 선신들의 제단은 각각 정면과 좌우에 한 자리씩을 차지하고 있었다. 빛나는 자의 황금빛 제단은 찬란한 후광으로 신도들을 굽어살피고 있었고, 진의 순은 제단 앞엔 신용카드로도 헌금을 낼 수 있도록 카드 결제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엘리빌론의 대리석 제단 위에는 정화의 성배가 티없이 맑고 깨끗한 성수로 채워져 있었고, 의사 가운을 입은 사제들과 함께 몇몇 부랑자들이 세례를 받으며 눈물흘리고 있었다. 저들도 언젠가는 다른 신의 신도들이었겠지, 싶은 생각에 노광은 저들이 흘리는 눈물이 회개의 눈물인지 죄책감의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오늘도 선신들은 그렇게 수많은 신도들에게 숭배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세 개 제단의 사이사이에 다른 제단들이 저마다의 신도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진의 제단이 있는 좌측에는 고자그의 제단이 있었다. 황금과 보석의 화려한 빛깔은, 빛나는 자의 제단으로부터 뿜어져나오는 순수한 광채와는 다른 광채, 이를테면 세속의 광채였다. 말쑥한 정장 차림새의 힐오크 정치인과 모피 스카프를 두른 채 형형색색의 여덟 반지를 뽐내는 옥토퍼드 귀부인. 오늘날의 상류 사회를 대변하는 모습이란 바로 그런 모습, 순은의 진과 황금의 고자그가 나란히 서있는 모습이었다.

그런가 하면 헤플리아클카나의 안개 자욱한 제단과 고급진 가죽으로 장식된 우스카요의 제단 앞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옛 시절의 추억과 조상들과의 가족애로부터 살아갈 힘을 얻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정신없는 향락과 예술을 통한 극한으로의 승화로 팍팍한 현실을 극복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헤플리아클카나 신도들의 엄숙하고 차분한 분위기와 우스카요 신도들의 다채롭고 활기찬 분위기가 대조되는 모습 역시 오늘날의 사회상을 잘 보여주는 지표였다. 다만 노광은 그런 분석보다는 다큐멘터리와 예능 프로그램으로 두 신의 모습이 대충 어떤지를 아는 쪽에 가까웠다.

페다스 마다쉬의 제단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자라나고 있었고, 지이바의 제단에 설치된 염기성 차폐막 너머로는 조그마한 슬라임들이 꼬물거리며 동전 따위를 받아먹고 있었다. 둘 모두 사회 운동에 아주 활발히 참여하는 신도들을 거느리고 있는데, 반세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두 신의 입지는 굉장히 희미했다고 한다. 페다스 마다쉬의 신도들은 고자그 신도들이 농경 사업에 투자하는 초거대 자본에 맞서 환경 보호를 위해 투쟁했고, 지이바의 신도들은 쓰레기 폐기라는 명목 하에 온갖 비윤리적인 처우를 받던 슬라임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목소리를 냈다.

그러기를 끊임없이 반복한 끝에, 여론은 이들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흘러갔고 이들은 마침내 도시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이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사회에 참여하고 있고, 노광은 그들이 퍽 마음에 들었다. 세상에 대한 분노는 억누를 것이 아니라 터뜨려야 마땅하기에-그들에게도 분명 트로그 님의 은총이 함께하지 않았을까 싶어서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언젠가 트로그 님의 신도들도 당당하고 떳떳한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꺼란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가 마크레브의 불타오르는 제단을 지나가면서, 노광은 경계심을 감추기 어려웠다. 악마들의 주신, 살육자 마크레브. 그/그녀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도시의 일원이 되겠노라고 선포했단 말인가. 마크레브의 제단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배치했다는 듯, 빛나는 자의 제단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었다.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악마들은 대체로 판데모니엄 자치구나 4대 지옥에서 출장을 나온 이들이었지만, 그래도 꽤 많은 수의 악마들이 도시에 거주중이었다.

처형자(Executioner)와 치치미틀(Tzitzimitl)부부 한 쌍이 카코악마(Cacodemon)들의 시중을 받으며 너무나도 태연히 마크레브의 제단에 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보며, 노광은 본능적인 경계심을 억누르기 버거웠다. 아마도 마크레브 주식회사 소속의 사설 경비업체 또는 PMC에서 일하는 악마들이리라. 어쩌면, 대대적인 어비스 파견업무를 마치고-시장 선거를 앞둔 시기에는 항상 있는 일이었다-돌아와 휴식을 취하는 중일이지도 몰랐다. 마치 노광이 힘겨운 철거작업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렇게 생각해보아도 일말의 경계심이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쉔자리의 산산이 부서진 제단을 지나갈 때면, 노광은 언제나 기묘함을 느꼈다. 아쉔자리의 신도들은 모두 하나같이 집이나 방에 스스로를 속박(bound)한 채로 지내는 탓에, 사실 아쉔자리의 제단에 신도들이 찾아오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아쉔자리의 제단은 계속해서 만신전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쉔자리의 신도와 랜선연애하는 썰>이라는 제목으로 사고즈 판에 올라온 어느 머포크의 글에 따르자면 어차피 제단이 어디에 있건 볼 수 있어서 별 상관없단다. 그래서인지, 아쉔자리의 제단 앞을 지날 때면 노광은 왠지모를 시선을 느끼곤 했다. 썩 유쾌한 느낌은 아니었다.

체이브리아도스의 제단 앞에서 명상중인 나가와 바라킴들을 지나, 시프 무나의 신도와 베후멧의 신도가 열띤 '학문적 토론'을 벌이는 풍경 사이로, 네멜렉스 죠베의 신도들이 즉석에서 카드깡 내기를 하는 뒤편으로 가면, 발길이 거의 끊어지다시피 한 제단 하나가 있다. 오카와루의 신도들과 무검회의 신도들이 서로에 대한 예를 갖추며 공손히 안부를 묻는 말소리 사이로, 트로그의 신도들은 요즘 도통 보이질 않는다는 말이 들려왔다. 노광은 그들의 말투가 연민과 동정의 말투임을 모를만큼 머리가 나쁘지는 않았다. 노광은 말없이, 성큼성큼 걸어가, 트로그 님의 제단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만신전에 자리한 여러 제단들 중, 트로그 님의 제단만이 대대적으로 디자인을 바꾸었다. 노광이 어렸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트로그 님의 제단에는 가짜 피를 구해서라도 피투성이 모습을 유지했고 마네킹의 머리라도 구해와서 올려놓았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점차 줄어들어가는 신도들의 발길이 끊어져감에 따라, 반사회, 반문명적인 신앙이라는 여론이 거세짐에 따라 모두 사라져 이젠 시뻘건 근육질의 얼굴없는 거인 조각상 하나만 달랑 세워져 있었다. 궁지에 몰린 언데드들이 점점 피폐해져가는 몰골로 찾아오는 루의 제단과 만신전의 모두를 향해 비웃음을 터뜨리는 좀의 제단, 그 가운데에 자리잡은 짐승 가죽을 걸친 채 어정쩡한 자세를 취한 붉은 조각상. 트로그 님이 저렇다는 걸까.


저길 봐요 엄마! 트로그 신돈가봐요!
에이, 설마. 요즘 세상에 어떤 나쁜 아이가 트로그를 믿니?
깔깔깔 바보같은 트로그!
들었어요? 저번달에 어느 트로그 미치광이가...
디스메노스는 신도들이 범죄자라서 그렇지, 사실 트로그보다 착한 신 아니냐?
차기 은빛당 당대회에 출마하시는 강 후보님은 트로그 신도들야말로 사회에 암적인 존재라고...
엘리빌론을 따르는 형제자매 여러분, 트로그의 신도들도 우리가 보듬어야할 사회의 약자이며...
김 형사, 우리 애들한테 얘기 들었수? 저번에 홍 경위가 순찰 도는데 글쎄 트로그 신도가...
새댁, 들어봐. 내 형부가 트로그를 믿는 미친놈인데...
광폭화 드링크? 그게 정말로 상품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P랑 T의 공통점이 뭔지 아냐? 파켈라스랑 트로그 둘 다 없어진 신이거든!
쉿.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트로그 신도들이 불쌍하지도 않냐?
요즘 트로그 신앙의 문파는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문을 닫는다더군요...
마법도 못쓰는 찐따들이라니까! 진짜야! 세상에나, 아직도 그런 병신들이 대학 들어오겠다고 지랄한다니까?
트로그 믿어서 밥벌이는 하겠냐?
폭력 시위 일어났다 하면 트로근데...
트로그 신도가 또...
...분노조절장애가 시사적 이슈인데...
......트로그가......
....트로그....
......
...


노광은 트로그의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트로그의 음성은 여전히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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